2007년 봄: 마가복음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복음의 본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

I. 오늘의 복음서 해석

1. 처음 읽는다는 마음으로
  1) 완전한 하나의 복음서로
  2) 적혀 있는 대로 공부하는 용기를
  3) 마가복음에 대한 평가, 있는 그대로
2. “복음”이라는 이름
  1) “복음”의 의미

II. 교회 안에서의 마가복음

1. 해석방법론
2. 마가 기사에 대한 접근법
3. 문학적 단서 해독
  1) 문학구조
  2) 세 개의 한 벌 구조
  3) 갑작스러운 시작
  4) 열린 종결
4. ‘내러티브(Narrative)’로서의 마가복음
  1) 관점(point of view)
  2) 묵시적 관점
  3) 구성(plot)
  4) 문체

III. 역사의 틀 안에 있는 마가복음

1. 마가는 누구인가
2. 어떻게 기록했을까
3. 어디에서 기록했을까
4. 왜 기록했을까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로마 제국에
    선포하고자
  2) 핍박 받는 공동체를 위해서
  3) 잘못된 신학을 바로 잡기 위해서
5. 언제 기록했을까 6. 마가복음 배경연구와 사회과학적 이해
  1) 마가복음의 사회-문화적 세계
  2)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상

IV. 본문 살피기

1. 거시적 구조
2. 미시적 구조
  1) 샌드위치 기법(Sandwich Technique)
  2) 쌍둥이 기법
3. 본문 분석
4. 개요

V. 내용특징

1. 왜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로부터
    시작되는가
2. 활동의 복음
3. 마가의 솔직함
4. 그 외의 특징들

VI. 신학적 문서로서의 마가복음

1. 예수님은 누구신가 : “하나님의 아들”
2. 메시아의 은밀성
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 제자도
5. 믿음
6. 하나님의 왕국
  1) 왕국에 대한 첫 번째 선언
  2) 왕국은 제자들로부터
  3) 왕국의 미래와 변형
  4) 왕국 입성
6. 종말론

VII. 오늘날의 세계 안에서의 마가복음 :
                  이 연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핵심어: “복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왕국”

I. 오늘의 복음서 해석

1. 처음 읽는다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마가복음이 처음으로 주어졌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1장 1절을 처음 본다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까, 아니면 실망에 빠질까? 하지만 우리에게 복음서는 이미 친숙해 있다. 잘 닦여진 길 위에 서 있다. 복음서를 읽고 해석하기도 전에 이미 그 책에 관한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 주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첫눈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선입견은 심각한 결점이 되기도 한다. 선입견들이 화석화된 모습으로 우리의 사고에 자리 잡을 수 있다. 변화에 대하여 강하게 저항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획기적인 변혁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는 충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복음서를 잘못 해석해 왔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적어도 복음서가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파악하는데 실패하지는 않았을까? 복음서가 말하려는 의도가 아닌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을까? 본 공부는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먼저 복음서를 처음 대하는 ‘새내기’의 마음을 갖도록 하자. 마가복음을 처음 읽는 ‘그때’로 돌아가 보도록 노력하자!

  1) 완전한 하나의 복음서로
  마가복음은 네 복음서 중 하나이다. 이 정의는 이미 마가복음의 성격과 내용을 알려 준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복음서는 그것을 문자화한 책이다. 마가복음 또한 예수님의 생애, 행적과 말씀, 그리고 그 의미를 알려 주는 책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오늘의 청중들에게 마가복음이 알려 주는 ‘그 예수님’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 예수님’을 만나고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는 좁게는 공관복음서 안에서 넓게는 네 복음서 안에서 다루어져 왔다. 왜냐하면 설교자들은 네 복음서를 종합하거나 조화시킴으로써 메시지에 대한 더 크고 완전한 상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중엽부터 전혀 다른 분위기가 등장했다. 마가복음을 다른 복음서와 구별하여 독자적으로 취급했다. 예수님에 대한 더 정확하고 더 근본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완벽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독특하게 복음서를 창작했다. 그것은 ‘전기적 주제’와 ‘케리그마적(kerygmatic) 주제’를 엮은 문학적 형태이다. 이 점은 마가복음의 예술성과 힘을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그 자체로, 그리고 전체로 읽어야 한다. 즉 완전한 하나의 복음서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전체로 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저자가 문장과 문단, 전체를 통해 알리려고 하는 종합적인 내용을 먼저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같은 단어, 같은 문장이라 하더라도 사용된 문장과 문맥, 사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초이다. 그런데도 이 상식이 자주 무시된다. 마가복음은 한 실제 저자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집이다. 어떤 문장, 어떤 단어라도 일단 마가복음의 틀과 구조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큰 숲을 본다는 의미이다. 모든 내용들은 그 숲을 이루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다.

  2) 적혀 있는 대로 공부하는 용기를

  설교자는 마가가 전달하는 내용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 내용을 설명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바꿔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읽고 말해야 한다. 간혹 글로 표현되어 있지 않는 의미들을 찾아내는데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본문의 깊은 의미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이것들 대부분은 본문의 문자적, 문법적 의미와는 배치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개 성경의 다른 책에서 빌려 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학적 사상에서 따오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한 책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를 전달의 수단으로 선택하셔서 복음을 공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언어가 가진 기능을 통해서 그 뜻을 알고자 해야 한다. 마가복음에 적혀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설교하는 용기와 지혜가 요구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마가복음은 문학적 형식으로 된 역사적 기록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중요한 특징은 이야기적 서술체로 표현된 신학이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서와는 별개로 읽어야 한다. ‘빠진 부분을 채워 넣기 위해서’, 즉 ‘마가복음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다른 복음서들을 끌어오지 않아야 한다. 둘째, 1세기 이야기인 마가복음을 오늘날의 문화적인 전제로 읽지 말라. 오늘 우리의 ‘trend’로 ‘삶의 틀’로 그 이야기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세계관과 1세기 세계관은 많이 다르다. 마가복음은 1세기의 ‘내러티브(Narrative)’이다. 따라서 1세기의 사회문화 정보에 근거해서 1세기의 틀로 봐야 한다. 셋째,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을 현대신학으로 읽지 말라. 각자 예수님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온유하고 부드러운 분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미지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마가복음보다 훨씬 뒤에 만든 삼위일체 교리와 같은 교리의 틀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런 시야로 접근하는 일은 잠시 뒤로 물려 놓자.

  3) 마가복음에 대한 평가, 있는 그대로 해야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서 사랑받지 못했다. 무시되기까지 했다. 마가복음의 내용이 대부분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분량이 적고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교훈도 아주 적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요약 판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부터 마가복음이 오히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보다 먼저 기록되었다고 믿었다.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다른 복음서에 뼈대와 내용을 제공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을 ‘마가복음 우선설’이라고 한다. 마가복음은 현 복음서의 형태로 기록된 최초의 복음서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을 자료로 이용하였다. 공관복음서 사이의 문자적 일치나 유사성은 이 때문이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복음으로 평가한 마가복음의 문학적 구조와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들의 틀로 사용했다. 마태와 누가는 공동으로 거의 235절을 함께 한다. 이것을 ‘Q 자료’라고 부른다.

2. “복음”이라는 이름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예수님의 생애의 이야기들”을 “복음서(εὐαγγέλια)”라고 불렀다. 이것은 당시 어떤 문학유형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장르이다. ‘예수님의 전기’라고 부르기도 곤란하고, 예수님의 업적을 기록한 ‘연대기’라고 부르기도 곤란하고, ‘회상록’이라고 부르기도 곤란한 문학적 구성형식을 묘사하기 위하여 새로운 단어를 선택했다. 그들의 손에 들어온 책들은 예수님의 생애, 사역, 죽음,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자료들을 “복음”이라고 부른다.

  1) 마가가 사용한 “복음”의 의미
  “복음(εὐαγγέλιον)”이라는 용어는 로마 세계에서는 자신들이 경험하는 ‘기쁜 소식’을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하였다. 황제 숭배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황제의 등극, 황제의 생일, 왕자의 성년식들은 제국의 국가적 축제일로서 성대히 지켰다. 이러한 날들의 축하 행사에 관해 알리는 것을 ‘기쁜 소식’이라 불렀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초기 기독교 안에서 ‘복음’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는 기독교의 내용을 대변하는 용어로 수용되었다. 마가 이전의 전승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이 명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마가가 이 용어의 창시자다. 그는 이 용어를 애호했다(1:14; 8:35; 10:29; 13:9-10; 16:15).
  마가의 목적은 “복음”을 나사렛 예수 안에서 역사적인 형태를 취한 ‘저 좋은 소식’으로 말하는 데 있다. 마가의 공동체는 이 소식이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과 생명을 주는 실체임을 알고 있다. 마가가 “복음”이라는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첨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복음”이라는 명칭에다가 부가했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경험된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따라서 서두의 제목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복음서 기자와 신학자로서의 마가”

II. 교회 안에서의 마가복음

1. 해석방법론
  복음서의 발전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1) 역사적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신 말씀과 사역, 2) 구전 전승의 시기, 3)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 이 세 단계들을 고찰하고자 특정한 방법론들을 채택했다.
  첫째,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신 말씀과 사역에 관심을 갖는다. 여기서는 ‘자료들(sources)’의 문제를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확실하고도 믿을 만한 자료는 무엇인가? ‘자료비평(source criticism)’의 질문이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과 최초의 복음서 기록 사이의 구전 전승의 기간에 관해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어떻게 구전 전승들이 초대교회 내에서 유지 전수되어 왔는가를 묻는다.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다. 마지막으로, 복음서 기자들의 신학과 견해를 알고자 한다. 이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자료들을 배열했고 수정했는가를 묻는다.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이다. 이 세 단계에 덧붙여 복음서 자료들의 배경을 이루는 다양한 삶의 정황(life settings)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역사적 예수님의 삶의 정황이 있고,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이 있다. 복음서 기자들과 그들이 속해 있던 공동체의 삶의 정황이 있다. 자료비평은 예수님의 삶의 정황을, 양식비평은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을, 편집비평은 복음서 기자가 속한 공동체의 삶의 정황을 연구한다.

  최근의 연구는, 세 번째인 마가 자신의 삶의 정황과 수신자인 마가 공동체의 삶의 정황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다. 각각의 복음서들은 특정한 공동체를 향해서 기록했다. 이것은 결국 시기와 장소에 관한 문제로 귀결된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어떠했는가? 유대인 크리스천인가? 헬라인 크리스천인가? 이들 양자로 구성되었는가? 공동체는 무슨 문제에 직면해 있었는가?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체제나 신앙과 같은 내면적인 문제들이었는가, 아니면 박해와 같은 외부적인 문제였는가?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있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다.

2. 마가 기사에 대한 접근법
  마가는 문학적 천재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복음서가 기독교 전통 형성에 결정적 전환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마가는 “복음”이란 말을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 속에서 최초로 이해한 인물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수난에까지 한 자락의 빈틈도 없이 이어지게 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하나하나 개별적인 형태의 계시가 아니라 그 대단원의 막과 일체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복음”이란 용어가 메시지뿐만 아니라 문학적 매개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마가의 이야기는 처음 읽으면 예술적이기보다는 직설적이다. 하지만 그 과묵함은 본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는 사람들에게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3. 문학적 단서
  1) 문학구조
  현대 독자들이 마가 메시지의 심장부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단서는 그 기사 속에 들어 있다. 그 첫 번째가 마가복음의 문학구조이다. 마가는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 이야기 부분들 사이에 정교하고 의미심장한 연결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세심한 독자들에게 그 고리를 알려주고 있다. 두 번째 단서는, 마가가 그 기사 안에서 인물들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다. 마가가 예수님의 문학적인 외양을 정교하게 구성하는 데는 서너 가지 도구가 있다: “그리스도”, “선생”, “주”, “하나님의 아들”, “인자.” 메시아적 칭호를 의미심장한 조합으로 활용한다. 예수님의 특징적인 행동을 독자들에게 헬라 세계의 위대한 인물의 느낌을 줄 수 있는 마술사나 현인 같은 용어로 묘사한다. 또 반대자들과의 갈등 관계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무리들이 감당한 무언의 역할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뽑으신 제자들 사이의 관계가 있다. 이 관계가 마가복음의 목적을 가장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2) ‘세 개의 한 벌’ 구조
  마가는 삼중구조를 좋아한다. 그는 씨앗 비유 세 가지(4:3-32), 요한에 대한 일반적인 평론 세 가지(8:27-28), 수난 예고 세 가지(8:31; 9:31; 10:33-34), 동산에서 깨어 있지 못하고 실패한 제자들의 모습 세 가지(14:32-42),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실(14:66-72)을 묶어 놓았다. 마가에게 있어서 ‘세 개 한 벌의 구조’는 구성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3) 갑작스러운 시작
  그 시작도 이 복음서의 독특한 성격을 보여준다. “복음의 시작”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세례 요한 사역의 연대기적인 시작을 말할 수 있다. 예언서에 근거를 둔 요한 사역의 신학적인 뿌리를 의미할 수 있다. 또 단순히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의 연대기적인 시작을 가리킬 수도 있다. 좀 더 깊은 의미로는, 창세기 1:1의 “태초”의 의미를 암시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죽음과 부활에서 일어난 일들은 그야말로 신앙과 제자의 삶의 “태초”이다. 지금 ‘처음으로’ 시작되는 동시에 영원히 계속될 기원이다.

  4) 열린 종결
  정경에 들어가는 마가의 본문에는 세 가지 다른 종결 부분이 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좋은 사본은 16:8에서 끝난다. 다른 사본들에는 예수님의 나타나신 이야기가 들어있기도 한다(16:9-20).  또 다른 사본들은 16:8 뒤에 결론으로, 혹은 16:9-20의 좀 더 긴 종결 부분에 연결되는 교량으로 종결어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짧은 종결 부분을 지지하는 주장이 좀 더 강하다.
  왜 짧은 종결어로 끝마쳤을까? 마가는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나타나실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과거의 어떤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부속시키지 않았다. 독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부활하신 주님은 단순히 과거의 삶을 다시 회복한 정도가 아니다. 능력의 주님으로 지금도 살아 계신다. 독자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인도하신다. 이 주님을 공동체가 알기를 원한다.

4. ‘내러티브(Narrative)’로서의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내러티브’ 문학으로 간주된다. 복음서를 내러티브로 인식하는 것은 복음서 이해와 해석의 새 지평을 열어준다. 첫째, 특정한 본문(사건)의 의미를 복음서의 세계, 즉 복음서 전체의 이야기 줄거리(narrative world) 안에서 이해하도록 해준다. 둘째, 독자의 참여와 반응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셋째, 구전(orality)과 구전사회(oral society)를 이해할 때 이 효과를 잘 알 수 있다. 내러티브는 ‘관점’과 ‘구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이에 대한 개괄적 고찰은 그 이야기가 어떻게 표현되고 흘러가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이 두 가지 특징은 복음서를 읽는 방법을 결정한다.

  1) 관점(point of view)
  ‘관점’의 파악은 저자의 저술 목적을 해독하는 열쇠이다. ‘관점’은 내러티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말한다. 내러티브는 ‘Narrator(내레이터, 화자)’의 관점을 보여준다. ‘내레이터’는 등장인물의 관점을 보여준다. 하나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관점은 ‘내레이터’의 관점이다. ‘내레이터’는 ‘내러티브’에서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을 일컫는 문학용어이다. 내레이터는 저자가 아니다. 그는 내러티브 자체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어떤 효과나 영향을 주려고 수사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그것이 바로 내레이터이다. 내레이터는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내레이터는 ‘전지전능한 관점(omniscient point of view)’을 지닌 익명의 제 3자로 나타난다. 내레이터는 기록된 모든 사건들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인물들의 사상, 감정, 느낌, 의도 등을 꿰뚫어 본다. 이러한 지식은 내레이터로 하여금 등장인물의 세계에 침입하여 어떤 장면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부가적인 주석이나 견해를 첨가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 등장인물의 관점에서부터 문제를 바라보도록 한다. 그 인물에 매혹되고 그 사물관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내레이터’는 시종일관 동일한 어조를 취한다. 어떤 사건이나 말에 초연한 듯한 자세를 취한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13:14). 이곳에서 내레이터는 직접 독자들에게 “읽은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언급한다. 내레이터는 독자의 관심을 모은다. 독자로 하여금 본문의 의미를 자세히 관찰하도록 권면한다. 예수님의 시험받으심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그리고 제자들을 향한 개인적인 가르침 등과 같은 사건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때에 내레이터는 중심사건이나 인물들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이런 방식으로 ‘전지전능한’ 내레이터는 독자들에게 자신을 신뢰하도록 만든다.

  2) 묵시적 관점
  관점에는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그것은 ‘저자가 자료를 어떻게 선정, 배열하는가’의 문제다. 마가는 이야기의 중심인물을 ‘묵시적(apocalyptic)’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밧모 섬의 요한이 세상을 보던 방식과 흡사하게 마가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가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 인간과 귀신 사이의 전장이다. 강한 자는 더 강한 자에 의해 타도되어야 한다(3:27). 이것이 가장 진하게 농축된 내용은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강화’이다(13장). 이것을 ‘작은 묵시록’이라고 부른다. 이 묵시의 상징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세상 세력들과 갈등의 관계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3) 구성(plot)

  1:1의 표제에서 구성이 제공된다. 구성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구성 혹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사건들은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해 주는 갈등을 수반한다. 예수님과 악마 사이의 갈등(1:12-13, 21-27; 3:23-27), 예수님과 로마 당국자들 사이의 갈등(15:2-15),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2:1-3:6; 12:13-44),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갈등(4:40; 8:14-21; 14:26-31), 심지어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14:35-36; 15:34)을 발견한다. 이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시는가?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에 맞서서 음모를 분쇄하신다. 죄인들을 용서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신다. 굶주린 자를 먹이고 자연의 세력을 복종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슬픔 그 자체를 물리치신다. 또 적대자들에 의해 도모된 역할(3:6; 11:18; 12:12; 14:10; 15:15)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신다(12:1-l2; 14:36). 이를 통해서 갈등을 극복하신다.
  갈등이 증대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신분(Identity)에 관한 문제다. 이 문제는 기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세례 받으실 때에 들려온 하나님에 의해 뒷받침된다(1:11).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의 울부짖음에 의해 확증된다(1:25, 34; 3:11-12; 5:7). 변화산상에서 들려온 하늘의 소리(9:7)에 의해 강화된다. 대제사장 앞에서 고백되어지며(14:61-62), 로마 백부장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선언된다. 예수님 신분의 완전한 의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에 비로소 등장인물들의 입으로 고백된다.
  특히 제자들의 반응은 구성의 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가르침을 받는다.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런 갈등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분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4) 문체
  문체는 간결하다. 단어들은 추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이다. 내레이터는 직접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간접적인 행동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마가는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생동감 넘치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그의 복음서는 빠르게 진행된다. 첫 장을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행동으로 뛰어든다. 거의 모든 문장이 “그리고”로 시작한다. “그리고 즉시”로 시작하는 경우가 41회이다. “그리고 다시”로 시작하는 경우는 21회이다. 반드시 시간과 관련해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의 긴박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계속 움직이고 계시니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다.

III. 역사의 틀 안에 있는 마가복음

1. 마가는 누구인가

  복음서 자체에서는 저자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익명은 아니다. “마가에 의한 복음”이란 제목이 저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마가’라는 이름이 그 시대의 로마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름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첫째, ‘마가’를 벧전 5:13, 행 12:12, 25; 13:13; 15:37-39과 몬 24, 골 4:10, 딤후 4:11 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가’와 동일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는 초대 교회의 두 거물인 베드로와 바울의 동행자였다.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을 베풀었던 곳(14:14-15, 행 1:13-14)으로 생각되는 마가의 어머니의 다락방에서 회합을 가진 예루살렘 초기 공동체의 일원이었던(행 12:12) ‘마가라 하는 요한’이다. 그는 물 한 동이를 가져가던 사람이었으며(14:13),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가던 한 청년(14:51-52)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둘째, ‘마가’와 ‘마가라 하는 요한’과 구별할 수 있다. ‘마가’를 바울보다는 베드로의 동행자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다. 베드로의 동역자인 ‘마가’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서 언급되는 바울의 동역자 ‘마가라 하는 요한’을 구별하고자 한다. 즉 로마에 있는 팔레스타인 계 유대인 그리스도인인 ‘익명의 마가’였다고 생각한다.

2. 어떻게 복음서를 기록했을까
  히에라폴리스(Hieropolis)의 감독이었던 파피아스(Papias)의 유실된 다섯 권의 책이 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 책에서 다음의 내용을 인용했다.
  “베드로의 해설자였던 마가는 주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많은 일들을 자기가 주목한대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순서대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직접 듣거나 혹은 주님을 따르던 제자는 아니었다. 그는 후에 베드로와 동행했다. 베드로가 그에게 주님의 교훈을 기록한 완성된 책을 남겨주지도 않았다. 그는 일화 형식으로 주님의 교훈을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자신이 전해들은 교훈들을 그대로 기록할 때에 실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자신이 들은 사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그대로 말하고자 하는 그 한 가지 일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3. 어디에서 기록했을까
  로마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는 첫째, 마가는 베드로와 동행하며 로마를 암시하는 듯한 ‘바벨론’에 머물렀다(벧전 5:13). 둘째, “과부의 동전”, 즉 희랍의 동전을 “고드란트”(12:42)라고 표현한다. “부라이도리온(뜰 안)”(15:16)이란 표현도 라틴식 어법이다. 갈릴리나 시리아를 기원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기원을 어디에 두느냐가 왜 중요한가? 그 기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수신자의 정황이 달라진다. ‘로마가설(Roman hypothesis)’은 수신자를 박해 아래 있거나 곧 박해 아래 있게 될 공동체로 본다. ‘갈릴리 가설(Galilean hypothesis)’은 수신자를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고 있는 공동체로 본다. ‘시리아 가설(Syrian hypothesis)’은 수신자가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적인 기대 속에서 순회 전도하고 있는 공동체로 본다.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성경해석이 달라지고 메시지가 달라진다.

4. 왜 기록했을까

  기록목적을 알려면 역사적 배경보다는 신학적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형식보다도 목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신학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저술 배경에 대한 이해는 해석상의 열쇠가 된다. 마가복음의 최종 본문이 과연 주후 l세기 로마 제국의 정황 속에서 의미가 통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현명하다. 1:1은 복음서 기자가 무엇을 기록했는가를 보여준다. 복음서 기자의 목적을 결정하고자 할 때에 여기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기자는 자기가 지금 무엇에 대해서 쓰려고 하는가를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복음이다. 복음을 집필한 이유는 무엇인가?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로마 제국에 선포하고자
  마가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여러 선포들과 물음들을 따라서 움직인다(1:1, 11, 24; 5:7; 8:27-30; 9:7; 10:47-48; 14:61-62; 15:39).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15:26)이라 쓴 죄패가 적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순간 로마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당시의 로마인들에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첫째, 패배를 당하여 처형당한 예수님은 그러한 인정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둘째, “하나님(신)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로마 황제뿐이었다. 마가는 로마 황제에 대한 기본 사상을 기초로 해서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다. 열 가지 주제로 비교해 본다.

로마마가복음  황제의 즉위나 승리에 관한 소식을 “복음”이라고 했다.
  “복음”은 종교적 사건으로 경축되었다. 왕의 후계자가 성년이 되었다는 “복음”을 전해 들으면 도시들은 즐거워하며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마가는 예수님의 생애와 공로가 “복음”이라고 단언한다.
  “복음”이라는 말의 뿌리가 이사야에 나오는 “바사르(רשׂב, 소식을 전하다; 40:9; 52:7)”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로마 제국에서 읽히고 선포될 책의 첫머리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천명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황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참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율리우스 가이사나 그의 어떤 후계자들도 “신(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 오직 메시아 예수님만이 그런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징조들과 예언들  황제의 즉위나 죽음에 앞서 징조들과 예언들이 있는 경우가 흔했다.
  술라(Sulla)는 “점에 의해서거나 영악한 추측에 의해서거나” 율리우스 가이사가 결국 독재자가 될 것을 예언했다. 그는 가이사가 암살될 것임을 “분명한 징조들”을 통해서 미리 알았다. 월계수의 작은 가지를 물어 옮기는 작은 새의 죽음도 그 징조들 중의 하나였다.  마가는 예수님의 출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수세 때(1:10-11)와 변화산 사건(9:2-8)에서 징조들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와 죽으실 때는 날이 어두워졌다(15:33).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일이 일어났다(15:38). 가장 놀라운 징조는 빈 무덤과 천사의 메시지다(16:1-8).개선식  큰 승리를 거둔 후에는 “개선식”이 열렸다. 이때 황제의 주권과 신적인 신분이 재천명되었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인도를 복속시킨 후에 광활한 아시아를 횡단했다고 해서 “개선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런 이유로 승전 후의 행렬은 “개선식”이라 불리게 되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1:1-11)은 로마 세계의 거민들에게 모종의 개선식에 대한 서곡이라는 인상을 준다.
  예수님은 어떠한 영광도 어떠한 환호도 받지 않는다. 자기가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신성모독으로 취급되어 사형 언도를 가져온다(14:61-64). 예수님은 마침내 개선식을 갖는다. 그것은 로마 군병들의 손으로 행해진 조롱의 개선식이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월계관이 아니라 홀과 가시로 된 면류관을 씌운다.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하례를 한다(15:16-20). 로마 황제에게 드려진 하례 인사를 흉내 냈다.신으로 떠받듦  로마 황제를 신적인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표현들은 공적인 금석문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전, 시가(詩歌), 교훈 및 변증을 위한 문헌들에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다(1:1l; 9:7). l세기 로마인의 관점에서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로마 백부장의 고백이다(15:39).주로
고백   “오, 가이사여! 어떤 무리의 신들이 머지않아 고소할지 모르는 당신은… 도시들을 감찰하고 우리의 땅들을 보살피시기 때문에 큰 세계가 당신을 풍부한 수확을 주시는 자요 계절들의 주로 영접합니다… 당신이 망망한 대해의 신으로 오셔서 뱃사람들이 당신의 신성을 숭배하든…”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신’이라는 의미에서 “주(κύριος)”로 불리지 않는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의 “주”로 종종 불린다(2:28; 5:19; 7:28; 11:3). 하지만 이 호칭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신적인 칭호가 된다(롬 1:4, 7; 4:24 등). 예수님의 행위들과 그가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 속에서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는 사실을 로마 세계의 사람들은 이해했을 것이다.신의 우편에 앉아 있거나 서 있음
  신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은 황제 숭배 제의의 의식 및 상징체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내(예수님)가 하나님 ‘우편에 앉은 것’을 대제사장이 보게 될 것이다”(14:61). 로마인들에게 황제 숭배 제의와 관련된 개념들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하나님 곁에 앉아 있는 이는 가이사가 아니다. 바로 예수님이시다.가이사를 기리는 헌주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연회에서 황제를 기려서 헌주들이 부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공적인 연회만이 아니라 사적인 연회에서도 그에게 헌주를 붓도록 모두에게 명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한 잔의 포도주를 나눠 마신다. 분명히 그분은 이것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언약의 피”(14:24)라고 설명하신다. 예수님을 기념하는 잔은 사람들에게 가이사를 기념한 헌주들과 유사한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황제의 “강림”과 새로운 세계 질서의 약속  사람들은 황제가 다시 강림할 것을 기다렸다. 이를 ‘파루시아’라 했다. 로마 황제들을 기려서, ‘강림 주화들’이 주조되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13장에서 강조된다. 특히 26-27, 33-37절이다. 가야바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14:62). “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1:15)는 로마 세계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 질서에 대한 약속으로 비쳤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그러한 약속을 할 수 있고 또한 이룰 수 있다.사후의 신격화   업적을 많이 남기고 존경받았던 황제는 사후에 신격화 되어 신들의 반열에 올려졌다.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백부장의 고백(15:39)은 신격화나 다름없다. 하지만 빈 무덤과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예고들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16:4-7).치유   로마 황제들은 그들의 신성으로 인하여 종종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치유 이적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묘사들 속에서 부각 되어 표현된다.

  마가의 공동체가 직면했던 문제는 분명하다. 수치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마가에게 이것은 전부 아니면 전무였다. 예수님은 로마인들의 손에 처형되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준다. 이것이 복음서 기자의 목적 중 하나였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2) 핍박 받는 공동체를 위해서
  60년대 말 로마의 독자들의 상황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60년대 말경에 기독교인들은 로마로부터 핍박을 경험했다. 기독인들의 종교적인 헌신과 열심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져 따돌림을 당했다. 본문에는 핍박을 가리키는 몇 개의 암시들이 나타나 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4-35). ‘십자가’는 로마 형틀을 상징한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8:38).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30). 현재의 충성에 대한 보상에는 핍박이 포함된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10:33). 예수님의 죽음에는 능욕이 뒤따른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믿음의 사람들을 위한 순교자로서의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13:8). 다가올 재난들에 대한 경고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13:9). 복음에 대한 증언이 로마인들 앞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마가 공동체는 ‘핍박받는 교회’다. 이들이 이 본문을 읽는다면 보다 깊은 의미를 얻지 않을까?

  다른 한편에서는 세례 요한의 순교를 통해서 마가 공동체에게 순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마가의 관심은 요한의 가르침에 있지 않다. 요한의 독립적인 사역이나 예수님께 세례 베푼 일에 있지 않다. 그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데 있다.
  “요한이 잡힌 후에”(1:14) 예수님의 공적인 활동이 시작된다. 마가의 의도는 요한의 운명과 예수님의 운명을 나란히 놓는데 있다.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에 의하여 죽음에 넘겨졌다. 요한이 악인들에게 받는 대우는 예수님의 종말을 예고한다. 예수님은 순교자로서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드렸다(10:45). 요한에게 일어났던 억울한 일이 예수님께 일어났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셨던 고난의 잔이 마가 공동체에도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네로의 분노와 그 여파 밑에서 고난 받는 백성들을 위한 본보기이시다.
  이 억압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시작한 왕국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했다. 이 질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위해 새롭게 정립한 기본원리를 제공해 준다. 또한 그 길을 갈 때 따르는 희생도 보여준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희망도 제공한다.

  3) 잘못된 신학을 바로 잡기 위해서
  마가 공동체 내의 신학적인 갈등을 해결하고자 기록했을 것이다. 이것을 ‘수정 기독론’이라고 부른다. 마가가 수정해야만 한다고 느꼈던 이단은 어떤 것이었는가? 마가의 교회는 종말을 열렬히 그리고 간절히 대망하는 종말론적인 기대에 빠져 있었다. 13:30 말씀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그러나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갈등에 사로잡혔다. 아무런 까닭 없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이 계시지 않지만 항상 주님을 열렬히 대망하는 기간 동안에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때 거짓 교사들이 등장한다. 교회는 혼란에 빠진다.
  마가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첫째,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들은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의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열광주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지는 삶이 없이는 참된 제자가 아니다. 둘째, 예수님만이 복음임을 가르친다.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5. 언제 기록했을까

  가장 초기의 전승은 로마에서 베드로의 순교 이후로 말한다. 바울과 함께 있던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극심하게 박해할 때인 64-65년경에 순교했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이보다 후대에 기록했다고 보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기록되었느냐, 아니면 그 이후에 기록되었느냐이다. 대부분의 논의가 여기에 집중된다.
  이 논의의 중심점은 13장이다. 13장은 전쟁 이전 설과 전쟁 이후 설을 모두 뒷받침하는데 사용되어져 왔다. 13:14은 67-70년경에 일어났던 전쟁을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예루살렘 멸망이나 성전 파괴와 관련된 사건들이 “멸망의 가증한 것”과 “산으로 도망가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13:3-37의 담화를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범주(13:1-2)에 넣고 있다. 13:14은 복음서 기자가 임박한 예루살렘과 성전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었을 때인 67-69년에 일어났던 성전의 멸망 이전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본다.

6. 마가복음 배경연구와 사회과학적 이해

  마가복음의 당시 독자들은 오늘 우리와는 사회, 문화적으로 매우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기후나 지형, 의복과 주거와 같은 사회적 삶의 형태와 문화와 종교가 다르다. 특히 이들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관점, 즉 그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들이 다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을 올바로 공부하려면 마가복음의 사회 문화적 세계를 이해함은 필수적이다.

  1) 마가복음의 사회-문화적 세계에 대한 이해
  당시 사회는 공동체 중심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언제나 상호관계성 혹은 호혜성의 관계(dyadic relationship)를 요구한다. 팔레스타인 사회는 하류층이 75%나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노동자 계층이 갖는 동일한 계층의식이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들은 항상 상류 계층에 예속되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평등의 관계나 개인적 자유와 가치, 즉 인권 문제란 생각할 수도 없다. 여기에는 항상 서열과 충성, 헌신, 봉사, 감사만이 존재했다.
  당시는 농경 유목 사회였기 때문에 자원이 철저히 제한되었다. 후원자와 예속자 사이의 관계 형성과 유지는 더 없이 중요하며 상호 관계성은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나눔과 돌봄과 자비의 실천은 영예로운 미덕으로 간주된다. 7:10-13에 나오는 “고르반”에 관한 예는 바로 제한된 자원 속에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부모공경에 관한 실천적 돌봄(출 20:12, 신 27:17)에 찬물을 던진 사건이다. 특히 명예와 수치의 가치판단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가치규범이다.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주로 성별과 신분과 지위와 종교적인 규범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헤롯이 연회장에서 요한의 목을 요청한 헤로디아의 딸에 대해 거절하지 못한 행동(6:22-29),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이도록 요구하는 지도자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사건(15장)은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회 문화적 가치는 유대의 정결법에 따라 규정되었다. 유대 정결법은 마가복음이 언급하고 있는 사회문화를 이해하는데 근간이 된다. 이러한 정결법의 이해 없이는 본문의 의미나 그 논쟁점을 올바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안식과 금식에 대한 논쟁, 바알세불 논쟁, 결례에 대한 논쟁,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고친 이적, 손 마른 자를 고친 이적, 거라사 광인을 고친 이적, 혈루증 여인을 고친 이적,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문답, 이방 선교와 이방인에 대한 이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정결규례에 대한 이해 등등.

  2)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상에 대한 연구
  당시의 사회 문화적 가치와 상징에 의해 그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는 자민족 중심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이해의 오류를 벗어나게 해 준다.
  1:10의 “하늘의 갈라짐(찢어짐)”은 히브리적 우주관(사 40:22)을 잘 반영한다. 이것은 15:38의 성전 휘장의 찢어짐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성전 휘장의 찢어짐의 의미는 헤롯 성전의 모습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새롭게 이해된다. 즉 예수님의 죽음 시에 찢어진 이 휘장은 히브리서 10:19-20에서 언급하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내부 휘장이라기보다는 성전 앞에 있는 하늘의 별들로 수놓은 커다란 외부 휘장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세례 시에 하늘의 갈라짐과 ‘인쿠르지오(inclusio)’를 이룬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력하게 입증함과 함께 그의 사역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있다.
  3:1-6의 의미는 그 당시 사회의 모습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회당의 구조와 구성원, 회당예배의 모습 및 안식일 준수와 그 의미를 알아봄으로써 이 본문의 배경과 상황을 파악하게 한다. 정결 규례와 관련하여 그 당시 사회상들을 이해한다면 본문의 참된 의미를 간파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유케 하였지만 종교 지도자들이 고소를 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실제적 치료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지거나 병이 낫도록 명하지 않았고 단지 손을 내밀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심문기사(14-15장)는 그 당시 로마의 심문 절차나 방법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불법성과 예수님의 무고한 죽음, 즉 의로운 대속의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십자가형에 대한 이해와 함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던 그 행진을 그 당시 개선행렬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역사적 탐구라고 여겨진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메시아로 등극한 섬김과 고난의 왕이셨다(10:45).

IV. 본문 살피기

1. 거시적 구조

  마가복음은 수사의문이나 실제의 물음 등 질문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대답 없이 그냥 지나간다(1:27; 2:7; 4:41; 14:4; 16:3). 약 114개의 질문이 있다. 그 중 77개가 무응답 혹은 수사 질문이다. 마가가 제기하고 대답하고자 하는 하나의 거대 질문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1:27이것이 무엇인가? 권세 있는 새 가르침인가?군중2: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하나님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서기관들2:16어찌하여 그는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서기관들2:24저희가 어찌하여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는가?바리새인들4:41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제자들6:2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지혜를 얻었는가?고향 사람들7:5당신의 제자들은 왜 유전대로 살지 않는가?바리새인들

  마가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일단 응답되면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밝히도록 구성한다. 위에서 인용한 모든 질문들은 예수님에 관한 질문이다. 그가 누구인가를 밝혀내고자 하는 장치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최대 질문에 대한 대답은 8:27-30에 나온다. 1:1-8:26과 8:27-16:8의 두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사건이 복음서를 두 개의 큰 단락으로 분류하는 전환점이라는데 동의한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 작업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실제 사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 설명은 세 장에 걸쳐 세 번 되풀이 된다: 8:31; 9:31; 10:32-34. 이 사명의 선언의 골자는 인자가 고난과 거부를 당하고 죽은 후에 제 3일에 다시 살아난다는 점이다. 개요는 다음과 같다.

질문들누구이며, 왜인가?1:1-8:27응답예수님은 그리스도(베드로의 고백)8:27-30사명이 무엇인가?고난의 사명8:31; 9:31; 10:32사명의 성취수난 내러티브11장-16장

  이 개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가의 주된 관심사가 기독론적임을 의미한다. 마가는 먼저 기독론적 질문에 바르게 대답한 후에야 예수님이 왜 죽어야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구조를 염두에 두고 전체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A. 서언(1:1-15);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소개한다.
  B. 1부(1:16-3:6); 예수님께서 하나님 왕국에 대한 선언과 함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다. 그는 속히 제자들을 부르시고 귀신을 몰아내시며 병든 자를 고치신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왕국(통치)의 도래와 관련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C. 2부(3:7-8:21); 의미 있는 세 집단의 역할에 대해서 서술한다.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은 군중에게 끊임없는 놀라움의 원천이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개인적인 가르침을 받고 있으며 복음 선포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교훈을 이해하는 속도는 빠르지 않다. 반대자들의 소리가 계속해서 점점 더 거세진다.
  D. 3부(8:22-10:45); 예수님은 자신의 관심을 주로 제자들에게 집중하신다. 예수님은 자기 왕권의 본질을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세 번에 걸쳐 설명하신다.
  E. 4부(10:46-15:47); 이야기가 절정에 도달한다. 왕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무리들은 흥분하며 그를 환영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배척이 그 날의 주된 반응이다. 예수님은 결국 “유대인의 왕”(15:2)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기 위해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진다.
  F. 결어(16:1-8);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2. 미시적 구조

  미시적 구조 분석의 예는 2:1-3:6의 논쟁 기사에 엿보이는 전후 대칭구조이다.
        A        2:1-12        중풍병자의 치유
           B        2:13-17        레위를 부르심/ 죄인들과 함께 잡수심
            C        2:18-22        금식 및 새 것과 옛 것에 관한 말씀
         B'        2:23-27        안식일에 이삭을 자름
        A'        3:1-6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

  이 단락은 치유 기사가 서두와 말미에서 전체의 틀을 형성하고 있다. 먹는 것과 관련해 두 개의 논쟁 단위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 근거를 중앙부에 두고 있다.

  1) 샌드위치 기법(Sandwich Technique)

  규칙적으로 발견되는 또 한 종류의 구성 장치는 ‘샌드위치 기법(Sandwich Technique)’이다. 혹은 ‘삽입법(intercalation)’이다. 이것은 두 이야기를 한데 엮을 때 첫 번째 이야기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 사이에 두 번째 이야기를 삽입한다. 이로써 첫 번째 이야기가 전체의 틀 역할을 하도록 한다. 이런 사례가 최소한 7개가 발견된다.
  (1) 바알세블 논쟁이 예수님과 그의 가족의 대면 사이에 끼어 있다(3:20-21, 22-30, 31-35).
  (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 안에 혈루증 앓는 여인의 치유기사가 삽입되어 있다(5:21-24, 25-34, 35-43).
  (3) 열두 제자의 파송과 귀환 사이에 헤롯의 잔치 기사가 나온다(6:7-13, 14-29, 30-44).
  (4) 무화과나무 사건이 예수님의 성전 내 행위를 전후로 두르고 있다(11:12-14, 15-19, 20-25).
  (5) 예수님 살해 음모 기사 안에 예수님이 죽음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14:1-2, 3-9, 20-25).
  (6) 예수님에 대한 공판 사이에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 나온다(14:53-65, 66-72; 15:1-15).
  (7) 예수님에 대한 공판과 처형 사이에 조롱의 대관식이 나온다(15:6-15, 16-20, 21-32).

  이런 기법을 사용한 목적은 무엇인가? 각 경우마다 독자로 하여금 두 이야기를 상호간에 비추어 읽고 하나로 다른 하나를 해석해 보도록 권하는데 있다. 무화과나무와 성전사건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2) 쌍둥이 기법

  또 하나의 장치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이중 기법’이다. 기적적인 음식 제공 내러티브(5천 명과 4천 명을 먹이신 사건)와 갈릴리 바다 위에서 있었던 제자들의 오해 이야기 등이다. 이 이야기들은 상호 번갈아 등장한다(6:3-44, 오천 명을 먹이심/ 6:45-52, 바다 위 이야기/ 8:1-9, 사천 명을 먹이심/ 8:10, 14-21, 바다 위의 이야기). 이런 이중 기법은 이전 기회에 배우지 못했던 제자들의 우둔함을 집중 조명한다. 이로써 그들의 과실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3. 본문 분석

  서언: 예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소개(1:1-15)
  “예수님에 대한 복음(좋은 소식)”은 이사야의 새로운 출애굽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1:3)는 말씀은 세례 요한의 등장을 선언해 준다. 그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때에 하늘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시편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창세기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리고 이사야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의 언어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운명을 규정한다.

  1부: 하나님의 왕국이 공개됨- 제자들, 군중, 배척(1:16-3:6)
          1:16-45, 제자들과 무리들
          2:1-3:6, 배척
  2부: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 믿음, 오해, 완악한 심령(3:7-8:21)
          3:7-4:34,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에 대한 소개
          4:35-6:6상, 능력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왕국- 세상의 눈먼 상태
          6:6하-8:21, 이방인들에게로 확대되는 하나님의 왕국- 제자들의 눈먼 상태

  3부: 드러나는 신비- 십자가와 제자도(8:22-10:45)
          8:22-9:29, 첫 번째 수난 예고와 반응
          9:30-10:31, 두 번째 수난 예고와 반응
          10:32-45, 세 번째 수난 예고와 반응

  4부: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왕(10:46-15:47)
          10:46-13:27,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왕- 분열된 (주님의) ‘집’
          14:1-15:47, 십자가에 못 박히신 왕

  결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16:1-8)
  결어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 그러나 그의 출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야기가 분명히 계속되고 있지만 마지막 사용된 단어는 “두려움”이다. 이것은 독자들이 두려움을 “경외감”으로 바꾸어 읽고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나아가신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기 위한 의도로 본다.

4. 개요

        I. 1:1-15 : 서론 -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1:1-15 ; 복음의 시작

        II. 1:16-45 : 예수님의 하루
                1:16-20 ; 첫 제자를 부르심
                1:21-34 ; 더러운 귀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
                1:35-4-5 ; 문둥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구원

        III. 2:1-3:6 : 예수님의 도전들
                2:1-12 ; 반대파들과의 논쟁
                2:13-17 ; 죄인을 부르심
                2:18-22 ; 금식에 대한 논쟁
                2:23-3:6 ; 안식일 논쟁

        IV. 3:7-8:26 :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사역
                3:7-12 ; 하나님의 아들로서 명성을 얻으심
                3:13-19 ; 제자를 부르심
                3:20-30 ; 예수님에 대한 비난
                3:31-35 ; 새가족
                4:1-20 ; 비유
                4:21-25 ; 경고
                4:26-34 ; 하나님 왕국
                4:35-41 ; 예수님의 권세
                5:1-20 ; 예수님의 권세
                5:21-43 ; 예수님의 구원
                6:1-6 ; 고향의 적대
                6:7-13 ; 제자들의 선교
                6:14-29 ; 세례 요한의 죽음
                6:30-44 ; 빵과 물고기
                6:45-52 ; 예수님의 권세
                6:53-56 ; 요약
                7:1-23 ; 정결법 논쟁
                7:24-37 ; 이방인 구원
                8:1-10 ; 두 번째 빵과 물고기
                8:11-13 ; 도전과 응전
                8:14-21 ; 경고
                8:22-26 ; 구원

        V. 8:27-10:52 : 예루살렘으로
                8:27-30 ; 자기계시
                8:31-9:1 ; 십자가의 길
                9:2-13 ; 제자들의 비전
                9:14-29 ; 구원
                9:30-37 ; 제자들의 속내
                9:38-50 ; 제자들의 역할
                10:1-12 ; 이혼
                10:13-16 ;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10:17-31 ; 부자에 대한 경고
                10:32-34 ; 고난
                10:35-45 ; 경쟁
                10:46-52 ; 구원

        VI. 11:1-13:37 : 예루살렘에서
                11:l-11 ; 입성
                11:12-26 ; 성전에서
                11:27-33 ; 권위에 대한 도전
                12:1-12 ; 비유
                12:13-17 ; 세금에 대한 도전
                12:18-27 ; 부활논쟁
                12:28-34 ; 첫째 계명
                12:35-40 ; 다윗 자손 논쟁
                12:41-44 ; 과부의 희생
                13:1-32 ; 성전멸망
                13:33-37 ; 경고

        VII. 14:1-16:8 : 죽으심과 부활
                14:1-11 ; 죽음예고
                14:12-25 ; 배반
                14:26-3l ; 베드로의 부인예고
                14:32-52 ; 예수님의 체포
                14:53-65 ; 심문
                14:66-72 ; 베드로 부인
                15:1-20 ; 빌라도 앞에서
                15:21-41 ; 재판
                15:42-47 ; 묻히심
                16:1-8 ; 빈무덤

  처음 시작 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1:1)로 규정된다. 수세 때와 변화산 사건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한다(1:11; 9:7).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12: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종말의 때를 알지 못하신다(13:32). 예수님은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대제사장의 물음을 공개적으로 수긍하신다(14:61-62). 그리고 끝으로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인정한다(15:39). 마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메시아 신분을 포함한)이심을 확증한다. 이 확증을 통해 독자들을 설득한다. 예수님은 막강한 로마에 의해 패배당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막강한 로마가 예수님께서 죽는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의 신성을 인정했다.

V. 내용특징

1. 왜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로부터 시작되는가
  초대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및 그의 말씀들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다. 반면에, 부활 사건 이전의 지상적 예수님의 말씀들에는 별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추측한다. 초대 교회의 초기 설교에는 지상에서의 예수님 사역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이 짧고 간결하다(행 2:22과 10:36-39).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들이 별로 중요시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순절 설교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부활 및 그에 대한 성경을 통한 변증에 할애 된다(행 2:23-36). 특히 흥미 있는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다(행 2:36). 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인정되신) 것은 지상에서의 그의 사역을 시작하면서나 사역을 하는 동안이 아니다. ‘부활을 통해서’였다. 바울도 로마서 1:4에서 예수께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선언한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요약해서 전하는 대목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한다(고전 15:3-5).
  마가의 교회에서도 부활 사건의 선포를 선호하고 예수님 전승을 가볍게 여기거나 심지어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영지주의 출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마가는 이에 대한 교정책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로부터 시작한다. 복음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확대해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포함시킨다. 부활 사건 이후에 기독교인들이 선포한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수난 이전에 선포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유효성을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kerygma, 선포)의 견지에서 확보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공생애를 강조한다. 예수님은 그의 지상 사역이 시작되던 순간부터(1:11), 그의 지상사역이 십자가에서 끝나던 순간까지(15:39),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이 예수님이 인류에게 “복음”이다.

2. 활동의 복음
  문체의 생동성은 십자가를 정점으로 급히 움직이는 드라마의 인상을 준다. 중풍병자를 내리기 위해 집의 지붕을 뜯는 일(2:4), 광풍이 몰아침(4:37-38), 배추 단처럼 질서 정연하게 군중들을 푸른 잔디 위에 떼 지어 앉히심(6:39) 등을 볼 수 있다.  마가의 주요 관심사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활동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모습은 어려운 질문에 대하여 신속한 답변을 원하는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들어맞는다.

3. 마가의 솔직함
  마가는 제자들 주위에 후광을 비추려는 의도가 없다. 여러 경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기술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4:1;. 6:52; 8:17, 21; 9:10, 32).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했던 태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묘사한다(3:21).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의 놀라움이 표현되었는가 하면(1:27; 10:24, 32),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권능을 행할 수 없었음은 백성들의 불신앙과 직접 결부된다(6:5, 6). 마가는 예수님의 인간적 반응을 묘사하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동정, 엄격함, 분노, 슬픔, 온화함, 사랑 등등의 감정들이 모두 차례로 예수님께 귀속된다(1:41, 43; 3:5; 8:12, 33; 10:14, 16, 21). 이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1:1)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서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그 외의 특징들
  1) 베드로 사도가 다른 복음서보다 더 뚜렷하게 부각된다. 굳이 베드로를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도 베드로를 별도로 언급한다. 이 복음서가 베드로와 관련이 있다는 인상을 짙게 남겨 놓았다.
  2) 다른 복음서보다 더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음을 반영하는 자료들이 남아 있다. (1) 아람어의 흔적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고르반” “달리다굼” “에바다” “엘로이”). (2)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표현들이 다른 복음서보다 많이 나온다(8:11-13; 9:30; 14:65; 8:31ff; 9:12; 10:32-34, 45; 13:32; 15:31). 복음이 후대로 넘어 오고 예수님을 향한 존경심이 커질수록 이런 인성적 표현들은 감소한다. (3) 제자들의 인간적 모습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 잘 기록되어 있다. 후대로 갈수록 제자들에 대한 존경심도 더 커지기 마련이다.
  3) 많은 내용들이 유대인보다는 이방인들 특히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되어 있다.
  4) 고난 받는 인자의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내용의 1/3이상을 예수님의 마지막 고난을 기술하는데 사용했다. “서론이 붙은 수난 기사집”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5) 메시아직과 고난의 필연적 관계가 부각된다(9:12). 마가복음의 기독론은 고난 받는 메시아가 그 핵심이다. 예수님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로서만 많은 사람을 위한 구속자가 되신다. 물론 이 고난의 배후에 승리자의 모습이 역력히 나타난다.